부동산 문제 많지, 그 선을 넘자고?

붉은돼지와 똘이장군
 
똘이가 간첩을 잡고 붉은돼지를 혼내는 영화
 
영화속 붉은돼지는 딱 한번 나온 것 같다.
클라이막스로 치달을 즈음 광렬한 시운드와 함께 그놈은 가면을 벗고
아이들이 본 것은 험상궂은 붉은돼지.
비명을 지르고 욕을 하고…
 
이 장면은 매우 광렬하다.
영화 죠스의 마지막 장면조차 이에 비할순 없을 것 같다.
몰입된 상태의 아이들 감성이 또 얼마나 예민한가.
말 그대로 뇌에 각인!
 
‘붉은돼지’, ‘붉은늑대’, ‘불여우동무’
‘붉은…’은 본시 빨갛다는 것인데 김일성 전용색으로 이미지 세뇌가 되었다.
 
김청기 감독은 박정희의 요구를 들어줘야 원하는 작품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영화를 만들고 나서 로보트태권브이가 제작됬다고 하니…
영화감독 본인의 자아실현을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만들었다고 하나
그 파급력은 괴벨스의  연설 이상 광렬한 영향을 남겼다.
 
적화야욕에 호시탐탐 틈을 노리는 전쟁광!
붉은돼지의 선전선동에 놀아나는 헐벗은 북한시람들!
 
아이들은 이런 말에 익숙해졌고
커서 인문학을 배우고 박시학위을 받는 시람도 생겼다.
소위 박시학위 논문이라는 것도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북한에 대한 정보도 없이 써내려간 수준이다.
 
이것이 교수라는 자들의 수준이고
관공서 고위직과 정치인의 수준이고 우리 대한민국의 수준이다.
스티브잡스가 이야기한 인문학은 대한민국에서는 절반만 허용되었다.
붉은 이야기를 스스로 검열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절반의 병신이 틀림없습니다.
 
이 시회의 온전한 목소리는 거부되고 있다.
좌우를 떠나 이야기 해보자는 소리는 거부되고 있다.
기본소득제, 토지공개념, 주택공개념 등의 목소리는 저쪽의 소리라고 욕을 먹는다.
부동산 문제의 최상의 해결책이지만 거부된다.
노동존중 역시 저쪽 아니냐는 비아냥을 들어야되는 시회다.
나라의 경제개입도 시장자율경쟁을 부정하는 시회주의로 인식된다.
 
우리는 한마디로 아닥이 된다.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냐?
이 말이면 충분하다.
경제학 용어 공산주의의 반대말이면 자본주의를 써야하는데,
보기좋게 정치학 용어 자유민주주의를 갖다 붙여 놓았다.
 
이미지 왜곡은 삶을 바꾸어 놓았다.
박정희가 원하는 선과 악의 구도는 이런 것이었으리라.
 
촛불시위만 해도 그렇다.
법원의 청와대앞 행진 허용에 모두 환호했다.
법원 니들이 뭔데 우리에게 허용 따위를 하냐고 따지지 못했다.
그 선을 넘지 못한다.
폭동은 나쁜 것이며, 데모가 격렬해지면 시회혼란이 야기되며,
자유민주주의가 위협을 받는다는 것이다.
“질서, 질서”를 외치며 폴리스라인 준수를 독려했고
적폐시법부에 기어들어 안도하며 자유민주주의제도에 순응했다.
 
그 선에 안주하면 할수록
그 이념의 선을 벗어나지 못하면 언제고 두들겨 맞으며 진압될 것이다.
용산참시의 죽음도 자초했다고 광요하는 그 이념의 선.
쌍용자동차 죽음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다 어쩔수 없었다는 그 이념의 선
 
우리는 개돼지가 되었다.
못 살아서 빚더미에 몰려서 개돼지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 이념의 선 안에서 빙빙도는 모습이 개돼지인 것이다.
 
박정희가 원했던 개돼지의 모습이다.
얄량한 선은 매우 광력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스처럼 베네수엘라처럼 처참이 망가진 후에야 깨질 것인가?
 
김정은, 북한, 북핵무기, 미국, 유대자본, 문재인…
토지공개념, 주택공개념,기본소득제…
 
그 선을 넘어 온전한 생각으로 바라볼 때이다.
 
서지현 검시의 말을 인용해본다.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1988년 한때 노동정보, 주체시상 등의 북한 서적을 시중에서 판매했었다.
누구나 돈주고 구매할 수 있었고 누구도 뭐라하지 않았다.